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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동안의 생방송이 끝났다. 언제나 힘든 생방송이지만, 이번만큼은 분신도 없어서 죽을 맛이다. 아무튼 나는 방송국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서는 집에서 그대로 소파에 엎드려만 있었다. 정말이지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그 때 갑자기 울리는 메신저 알림. 하필이면 이럴 때에 메시지냐고. 대체 누구야.

'생방 잘 끝냈어?'

엇, 도영 씨다. 분신들을 데리고 있는 그 오빠. 나는 곧바로 도영 씨의 메시지에 화답했다.

'점심은?'

점심이야 혼자서 먹었지. 좀 쓸쓸하긴 했어.

'그럴만도 하겠지.'

내 말이.

'돌아가거든 맛있는 거 사줄게.'

분신들한테도?

'당연한 소릴 왜 하냐.'

흥. 칫. 뿡이다. 분신들 다 데리고서는 잘 먹이고 있으면서. '나 삐짐'. 전송. 그러자 답장이 날아왔건만, 역시나 도영 씨는 장난도 잘 친다. 고작 메롱하고 있는 이모지(Emoji) 하나 뿐이다.

얼마나 더 엎드려 있었을까, 도영 씨 한테서 또 하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어라? 이번엔 사진이네. 용량도 좀 크고. 사진을 다운로드 해 놓고 보니, 전망대에서 점프샷을 찍은 게 보인다. 분신들만 있는 걸로 봐서는 도영 씨가 직접 찍어 준 모양이다. 그나저나 도영 씨는 왜 안 찍었대?

'삼각대 없어. 셀카봉도 없어.'

그런 거라면 설명이 된다. 하지만 그런 건 지나가는 사람한테 찍어 달라면 되잖아.

'아. 잠만.'

내가 미처 말을 전송하기도 전에 말을 끊는 도영 씨.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사진이 전송되었다. 다운로드 하고 보니, 못 볼 걸 보고 말았네. 얘들은 왜 도영 씨를 감싸놓고 있는 건지. 보나마나 샤우라가 꺼낸 아이디어다. 이래 갖고는 찍는 사람도 부끄러워 하겠다. 나 같았어도 이불 찰 듯한 사진이다. 도영 씨의 양쪽 볼은… 말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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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배!"

간만에 집안에 활기가 넘친다. 7명의 미사키가 집안의 빈 자리를 채워줘서 그렇다. 그래서 지금은 뭐 하고 있냐고? 얘들이랑 같이 치킨 먹고 있지. 나는 바로 옆에 맥주 끼고 있고, 나머지는 술을 못 마시니 콜라로 대신하고 있다. 어찌됐든 이 조그마한 파티를 위해 희생된 5마리의 닭에 잠시 묵념. 밥은 따로 하지 않았고, 맥주는 아까 딴 것을 포함해 3캔, 콜라는 대충 12캔을 사 뒀다. 나에게는 아주 익숙한 '치맥' 문화가, 미사키들에게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집에는 어떻게 도착했냐고? 공원에서 직행하는 산책로가 있었지. 다만 산 정상을 지나가야 해서 정상까지 10분, 하산에 다시 10분이 걸린다. 나 혼자만 해도 이 정도인데, 얘들까지 끌고 가니 시간이 더 오래 걸리지. 게다가 귀차니스트 두 명(벨 & 부부)의 걸음걸이가 엄청 느려서, 실제로는 2시간이나 걸렸다. 마지막으로 집으로 가는 하산길은 가파르기가 끝장이라서 유니코마저 조심스러웠다. 여튼 집에 도착했더니 어느덧 석양이 지고 있었다. 돌겠네, 이거. 그래도 정상에서 바라본 시내의 모습은 여전히 좋더라. 이 맛에 산을 오르내리는 건 아닌가 싶다.

아무튼, 난 지금 맥주를 2캔 째 따고 있다. 부부 역시 2캔 째, 물론 콜라다. 유니코와 라이오 역시 한 캔 더 땄다. 나머지는 잘 먹었다는 말을 하고서는 내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다시 출국할 때 까지 작업실에서 잘 것이라서 그리 문제는 되지 않는다.) 거실에는 4명 만이 남아 있다. 그 와중에 부부와 나는 남은 닭다리를 뜯고 있었고, 라이오와 유니코는 닭날개 하나 씩. 몸통은 퍽퍽한 가슴살만 남아서 그런지 아무도 건드리려 하지 않는다.

간만에 술 좀 마셨더니 헤롱헤롱. 아, 맞다. TV 틀어놔야지. 오늘은 또 뭘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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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은 오늘 오후 5시 쯤 사쿠라다 국왕 대리를 만났습니다. 어제 갑작스럽게 방문하였던 국왕 대리는 사정이 있어서 무례를 범했다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또한 국왕 대리는 아홉 남매를 재활시킬 수 있는 적임자를 우리나라에서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통령은 이를 계기로 외교적 관계를 강화해, 세계적인 동업 관계를 구축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이후 진행된 인터뷰에서, 국왕 대리는 미사키 공주의 분신들은 경호원과의 연락을 통해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만을 언급했으며, 현재 위치 등 기타 사항은 언급을 일체 거부, 나아가 기사화 자체를 자제해 달라는 '오프 더 레코드'(off-the-record)도 요청하였습니다. '적임자'의 정체 역시 자세하게 밝힐 수 없다며 인터뷰를 일체 거절하였습니다. 국왕 대리는 내일 '적임자'를 위한 계약 체결을 중심으로 활동을 지속할 예정이며, 이후 하루 정도의 휴식을 가진 뒤, 오는 토요일에 전용기를 통해 왕국으로 귀국할 예정입니다.

한편 미사키 공주 본인은 오늘 오전에 생방송으로 진행된 왕립 토론회에 출연해, 남매들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공주는 벌써 9달이 되어가는 '브레이크 아웃'에 분신들은 물론 자신도 지쳐가고 있음을 시인하고, 이에 따라 분신들의 힐링을 위해 여행을 보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공주 역시 분신들이 정한 여행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거절했으며, '임시 보호자'와 같이 출국했던 만큼 모든 것은 '임시 보호자'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만 말했습니다.

날씨입니다. 내일은 비구름의 영향으로 오늘 밤 부터 제주 및 남부 지방부터 비가 시작되겠습니다. 수도권 및 충청도는 5에서 10 밀리미터 정도가 내릴 것으로 예상되며, 남부 지방은 20밀리 안팎, 제주도 및 남해안은 최대 40 밀리미터가 내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중부 지방은 내일 아침, 그 밖의 지방은 오후 늦게 그치겠습니다. 아침 기온은 서울 8도, 대구 12도 등으로 예상되며, 낮 기온은 서울 16도, 광주 19도 등으로 어제와 비슷하거나 조금 낮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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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뉴스의 말미는 미사키네 식구가 장식했다. 특히 날씨 직전에는 미사키가 직접 뉴스를 장식. 진짜 옆 나라라서 그런지 하루도 빠짐없이 나오는 것 같다. 무슨 땡전뉴스도 아니고. 아니, 땡전이라 치기에는 거꾸로잖아. 뒤에는 날씨도 나오고.

그나저나 벌써 3캔 째 들이대고 있다. 슬슬 시야가 흐려진다. 그나저나 경호원들이 오질 않네… 하는 순간 초인종 소리가 들려온다. 비디오폰을 지긋이 바라보는 라이오, 곧바로 자기가 문을 열어 주겠다며 나선다. 잠깐, 문 어떻게 여냐고? 저기 네모난 버튼 있지, 그거 눌러. 응. 응. 그거.

라이오가 문을 열어주자 경호원 분들이 정체 불명의 가방을 가져왔다. 뭡니까, 그거. 설마, 국왕(대리)님 모신답시고 서울까지 갔다 온 겁니까. 그러자 두 분 다 긍정. 이러니 술이 깰 수 밖에 없지. 그럼 그 가방도 서울 가서 얻어 온 거랍니까. 아무래도 나랑 얘기할 게 있나보다. 맞다, 라이오하고 유니코는 부부 업고 잠시 방에 들어가 있어. …라지만, 셋이 들어가니 다른 넷이 나온다. 무슨 조삼모사냐. 별 수 없다. 다 나오라 하는 수 밖에.

그렇게 열 명이 거실에 빙 둘러 앉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계약 당사자(?)인 세 명이 중간에 앉아 있고, 이를 나머지 일곱 명이 둘러 앉는 식이다. 무슨 계약이냐고, 대체. 아무튼, 뭐 때문에 그 수상한 가방을 가지고 왔대요? 그러자 남자 경호원은 블랙 케이스에서 짙은 황토색 서류 봉투를 꺼냈다. 거기에 등봉된 서류를 읽고 보니, 무슨 계약서래. 위의 서류 이름을 봤더니 임ㄷ… 뭐? 임대 계약서? 그것도 한 통도 아니고 두 통이나 있다. 뭔가 해서 물어봤더니 하나는 주거지용, 또 하나는 비밀이란다. 주소는 역시나 처음 보는 주소들이라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미사키들에게도 물어봤지만 노 코멘트 일색이다. 치사하게시리, 이럴 때에는 대답 좀 해 줘라. 쫌!

※ 'Teritorio de Leontodo'는 에스페란토로 '민들레 영토'를 의미합니다.
※ 이 소설은 '성 아랫마을의 단델리온' 팬 픽션입니다.

원 포인트 Q&A
Q. 크리스마스에는 뭐 하죠?
A. 하...핳핳핳 ㅠㅠ

'나'를 정의하는 것은 결코 '환경'이나 '유전자' 따위가 아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존재의 연속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