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이도영 씨, 거기서 뭐하고 계셨습니까?"

태블릿을 조작하는 와중에 갑자기 집사 한 분이 들이댄다. 깜짝 놀랐잖아요. 하마터먼 태블릿 떨어뜨릴 뻔 했네. 집사는 출발할 시간임을 알리며 방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한다. 별 수 없다. 이 건물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봐야 되겠다.

집사 따라 다시 게스트 룸으로 돌아가자, 어느새 7명의 미사키가 대기하고 있었다. 우선 나는 여권을 받았냐는 질문을 한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아직은 못 받아서 여기 게스트 룸에서 대기하고 있단다. 하긴, 여권이 있어야 출국을 하든 말든 하지. 그렇게 얘기하자 마자 또 다른 집사가 들어온다. 미사키들의 1회용 여권이 발급된 것이다. 7명이서 자기 여권을 챙기려 안달이다. 나도 내 여권을 확인하려 캐리어에 눈길을 돌린 순간, 전에는 없었던 서류봉투가 캐리어 위에 놓여 있다. 내가 그 동안 캐리어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 서류봉투에는 'Visa'라는 표기와 함께 내 이름이 같이 표기되어 있다. 서류봉투의 내용물을 꺼내 읽어보는데, 역시 특급 비자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친필 사인이 되어 있는 특급 비자 발급 허가서.

그 동안 미사키들은 자기 여권을 나눠 챙겨갔다. 내 여권은 배낭에 있으니 거기서 꺼냈다. 그러자 이나리가 여권 보여달라 한다. 내가 보여준 여권에는 나의 앳된 모습이 사진에 그대로 담겨 있다. 그러고 보니, 얘들이 자기 여권을 어떻게 챙겼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한 번 물어봤는데, 유니코를 중심으로 각자 자기 여권을 보여준다.

내 여권에 비해서는 확실하게 초라해 보이는 단수 여권들, 거기에는 각자가 찍은 사진이 그대로 박혀 있다. 유심히 성명을 확인하는데, 성은 'SAKURADA', 이름은 'MISAKI'인 점은 똑같다. 유일하게 다른 곳은 미들 네임. 각자 'MISAKI'라는 이름 뒤에 별명이 미들 네임 식으로 쓰여 있다. 그러니까 벨의 경우는 미들 네임으로 'BELL'이 부여돼, 풀 네임은 'Sakurada, Misaki Bell'이 되는 식으로 말이다. 확실히 이 방법이 분신들 구분 짓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나은 방법인 듯 싶다. 대외적으로도 편한 방법이기도 하고. 이 방법은 미사키 자신이 제안한 것 같지만, 그런 사정은 본인에게 직접 물어봐야 알겠고.

모든 준비는 끝났다. 게스트 룸 안에 있는 캐리어는 총 8개. 옥색의 캐리어가 내 것, 나머지 무지개빛 캐리어들은 다른 미사키들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지고 온 배낭까지 합하면 총 9개의 가방이 있는 셈. 배낭 역시 옥색 하이라이트 처리가 되어 있다. 비자 서류가 들어있는 가방을 맨 건 나다. 다른 미사키들에게는 배낭이 없으니 그냥 캐리어만 끌어도 충분하겠지. 게스트 룸에 어질러져 있던 것들을 정리하자 집사가 들어왔다. 이에 우리 8명은 게스트 룸을 나서고 북문에 비치된 밴을 향해 걸어갔다.

여기 왕궁에서 공항까지는 어림잡아 1시간 반 정도 걸린다. 그 말인 즉슨, 내가 어제 리무진에서 졸았던 시간이 그 정도였다는 얘기도 된다. 또한 내가 졸 수 있는 시간도 그 정도란 얘기. 그런데 뒤를 돌아 보니, 거의 전멸이다. 벨이 가운데에 있고, 양 옆을 라이오와 유니코가 지키고 있다. 앞 칸의 샤우라도 곯아 떨어졌고, 오른쪽의 부부는 먹을 것으로 잠꼬대를 해댄다. 왼쪽의 레비는 악몽 때문인지 힘겨워하고 있다.

대화할 상대가 없다 생각한 나는 태블릿을 꺼내 다시 '테리토리오'의 구상안을 적어나갔다. 한참을 적어가고 있었는데,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약간 놀란 눈치로 돌아봤더니,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이나리였다. 하마터먼 깜빡할 뻔 했네. 그나저나 시간이 많이 걸릴텐데, 너도 좀 자라. 그러자 이나리가 호기심에 태블릿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서는 태블릿에 적힌 내용에 대해 묻는다.

태블릿의 좌상단에는 'Teritorio de Leontodo #2'이라는 글씨가 제목으로 달려 있고, 그 밑에는 '테리토리오'에 대한 간단한 스케치가 되어 있다. 어제 말했던 카페 얘기냐고 이나리가 묻자 긍정. 그리고는 내 눈을 다시 태블릿 화면에 고정했다. 이 때 이나리가 살짝 거든다. 이 쯤에다가 8인용 테이블을 비치하는 것이 어떻냐고. 고마운 아이디어이긴 했지만, 나는 이나리의 아이디어를 조금 수정해 카페 뒤쪽에 팔각정을 두고, 그 중앙에 좌식 테이블을 놓는 것으로 대신했다. 카페 뒤쪽은 조그만 하천(해자로 추정된다)이 있는 곳이라 분위기 면에서도 이게 더 낫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에는 부동산 문제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기에, 나는 파일을 복사해다 이나리의 아이디어 대로 카페를 다시 디자인했다. 그렇게 해서 붙은 이름은 'Teritorio de Leontodo #2 - ver. Inari'.

그렇게 이나리의 제안과 내 제안을 비교해 보는데, 어느새 공항에 도착했다. 경호원이 깨울 틈도 없이, 나와 이나리는 다른 미사키들을 깨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출국 쪽 M 게이트, 다른 게이트와는 달리 매우 한산한 곳이다. M 게이트는 대체 어떤 용도로 쓰이느냐고 물었다. 경호원 대신 이나리가 대답한다. M 게이트는 왕가 또는 귀빈이 출입국을 할 때에만 쓰이는 게이트라고 말이다. 출국한 적도 없을텐데 어떻게 잘 아냐는 질문에, 이나리는 그저 얼버무린다. 추정하건대, 미사키의 마음 속에 있을 때 기억을 공유하면서 터득하는 듯 싶다.

공항에 도착하자 반기시는 분은 대체 누구시더라? 조금 생각하려는데 갑자기 얘들이 우르르 몰려가 중년 여성분께 반긴다. 알고 보니 미사키네 엄마, 그러니까 왕비 정도는 되는 분이시다.

"소식은 잘 들었어요. 이도영 군."

아, 네. 미사키의… 그러니까 얘들의 어머니 되시는 분이죠? 이에 긍정하시는 부인. 이윽고 나에게 뭔가를 보여준다. 알록달록한 색상의 띠를 엮어서 만든 팔찌다. 왕궁에서 수작업으로 만드셨다나 뭐라나. 아무튼 그 팔찌를 부적 삼아 왼팔에 감아보았다. 그냥 띠를 엮은 팔찌일 뿐인데, 빛나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이윽고 어머님은 나에게 한 마디 하신다.

"임시 보호자로서, 잘 부탁해요. 이도영 군."

그러니까, 귀국해 있는 동안에는 내가 미사키들의 보호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명시적으로 긍정한 나는 7명의 미사키를 데리고 귀국길에 올랐다. 미사키들 입장에서는 관광이고 하니 비자는 필요 없겠지만, 그래도 여권은 필요하기에 우리 8명은 각자의 여권을 보여준다. 나 혼자 반짝반짝 빛나는 기간제 여권이고, 나머지는 아까도 말했다시피 1회용. 그러자 공항 직원 분께서 한 마디 던지신다.

"미사키 공주님…들의 '임시 보호자'이신가요?"

이에 나는 명시적으로 긍정했다. 나머지 7명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공항 직원 분은 '본래의 미사키'가 없다는 점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사실은 얘들이 놀러 가고 싶다는 마당에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있는 겁니다. '본래의 미사키'는 내일 무슨 뉴스 프로에 나온답시고 빠졌어요. 그러자 직원 분께서 조그맣게 웃으신다. 이런 일은 처음 봤다고 말이다. 그래도 분신들만 있는 게 결격사유인 건 아니라서 우리는 무사히 출국 수속을 끝낼 수 있었다.

출국 수속을 끝내자 직원 분들이 분주히 7개의 캐리어를 끌고 있느라 바쁘다. 내가 집요하게 끌고 있는 옥색 캐리어만 빼고 말이다. 미사키들이 서로 잡담하는 가운데 짐 맡기는 곳에 도착하자, 8개의 캐리어가 전용 컨베이어 벨트에 실린다. 7명의 미사키는 물론이고, 배낭을 메고 있는 나도 검색대를 통과… 아차, 태블릿과 휴대폰을 넣어 놨었네. 텀블러의 금속 성분도 걸렸고. 아무튼, 약간의 잡음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무사히 통과했다. 삑삑대는 소리가 나자 미사키의 '롤롤'들이 킥킥댄다. 웃지마, 내 얘기야.

26

분신들은 잘 있을런지 모르겠다. 주위를 돌아보지만, 분신들의 자리는 텅 비어 있다. 그래서인지 다들 나를 걱정하는 눈치이다. 아니, '내'가 아니라 다른 '미사키'에 대한 걱정일 것이다. 마음이 심란하다. 8명 중에 7명이 보이지 않으니 내 자신이 여덟 조각으로 나뉜 듯한 느낌도 든다.

달리 생각해 보면, 내가 그 동안 분신들에 너무 의지한 감도 없지 않다. 적어도 내 스스로 부 활동을 한 적은 중학교 때에도 없었으니까. 고등학교에 진학한 요즘도 내 역할은 우리 집의 대표 인터뷰 정도가 전부. 그러니까 나는 식구들 가운데서도, 분신들 가운데서도 '대변인' 말고는 할 게 없었다.

그런 나에게 어제 보았던 로봇 물고기는 충격 그 자체였다. 유유히 꼬리를 흔들며 위용있게 다가오는 그 모습은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 어쩌면 그 물고기는 스스로의 위대함을 강조해, 그 자존감을 나에게 주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나 혼자 돌봐야 되겠네. 이렇게 생각하니 분신들의 소중함이 더욱 느껴진다.

※ 'Teritorio de Leontodo'는 에스페란토로 '민들레 영토'를 의미합니다.
※ 이 소설은 '성 아랫마을의 단델리온' 팬 픽션으로, 매주 토요일에 2파트 씩 연재됩니다.
※ (10/26 ~ 10/29) <성하동 민들레> 여행 기념, 4일간 특별 연재됩니다. (토요일엔 4파트!)

'나'를 정의하는 것은 결코 '환경'이나 '유전자' 따위가 아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존재의 연속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