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여어. 사진은 잘 찍었어?

막 여권 사진을 수령한 '7인의 미사키'(본체 제외)를 향해 손을 흔든 건 역시 나다. 사실 난 잠시 왕궁 정원에서 쉴 참이었다. 바람도 쐴 겸 하고 말이지. 생각을 정리할 겸 해서 미사키들하고 얘기를 나눠 보았다. 그나저나,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여권 발급받는 게 가능해? 우리나라선 최소가 사흘인데. 이에 걱정 말라는 이나리. 자신들도 왕가 식구(…의 분신)라서 비자 발급은 물론이고 여권 발급 역시 우선권을 지니고 있단다. 그래서 오후에 신청하면 다음 날 오전에는 찾을 수 있다고.

마음이 놓이긴 하지만, 이나리는 이내 자신들은 단수 여권 밖에 못 받는다는 사실에 서글퍼 한다. 풉. 솔직히 너희들은 제대로 주민등록이 안 되는 분신인데 별 수 없잖아. 그러자 이나리는 나한테 매달려서는 울어댄다. 바보같이. 그런 건 차라리 본인한테 얘기를 하던가. 그렇게 이나리하고 실랑이를 하는 도중에 집사가 찾아왔다. 전용 비행기 예약을 마쳐서 내일 오전 중에는 출국할 수 있다고 말이다. 하긴, 국왕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전용기라지만, 적어도 그 시설은 마음대로 못 하니 말이지. 아무튼 알겠습니다. 집사 분은 오늘만은 게스트 룸에서 묵어 달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난다.

그 말인 즉슨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야 된다는 말이다.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나리는 여전히 떼를 쓴다. 손을 살짝 놓자 이나리가 쓰러진다. 다른 애들이 킥킥 웃어댄다. 이럴 때만 보면 생김새가 같은 것만 빼곤 평범한 여학생들이다. 이나리를 제 풀에 쓰러지게 한 나는 곧바로 휴대폰을 찾아보았다. 젠장, 방에 놔뒀네. 어차피 이 나라에서 휴대폰을 쓸 일은 없을 것이고. (그나저나 선불 USIM 값 아깝네.)

그렇게 7명을 보낸 나는 근처 정원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주변 풍경을 감상해 본다. 항상 열려 있는 남문이라서 그런지 관광객이 많이 보인다. 아이스크림 가게도 보이고, 솜사탕 만드는 기계도 보인다. 유심히 찾아보는데, 유독 하나 없는 게 있다. 카페, 그러니까 찻집이다. 이렇게 넓은데 찻집 하나 없다니. 대신 '세 놓음'이라 쓰인 건물 하나가 보인다. 왕궁에 비하면 정말이지 조그만 벽돌 건물이지만, 그래도 2층 정도는 되어 보인다. 저기에다가 '민들레 영토'를 다시 차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유레카! 저기서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남의 나라에서 폐인처럼 살다 죽느니 차라리 카페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게 낫지. 왜 그걸 생각 못했을까! 완전 나체로 목욕탕을 뛰쳐나갔던 아르키메데스 처럼 나는 곧바로 게스트 룸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22

여권 사진을 다 찍어놓은 분신들이 돌아왔다. 이윽고 여집사 분도 들어선다. 이도영 씨 계시냐는 말에 우리 8명은 부정. 그러자 여집사 분은 나에게 서류 봉투를 하나 건네준다. 국왕님(그러니까 우리 아빠) 자격으로 비자가 발급됐다고 전달해 달라신다. 여집사가 나가자 마자 나는 곧바로 도영 씨의 캐리어 바로 위에다 서류 봉투를 갖다 놓았다. 봉투를 갔다 놓고 우리끼리 잠시 잡담을 나누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우렁찬 발소리가 들려온다.

엄청난 기세로 문을 열고 좋아하는 도영 씨. 뭔가 잘못 먹은 건가 싶었다. 표정도 아주 눈이 부시다. 그리고는 날 찾아와서 하는 말이.

"여기다 카페 차리면 돼!"

네? 지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립니까? 왕궁에 카페라뇨? 설마, 2호점?

"아니, 본점!"

예?? 본점? 갑자기 어이가 가출해 버렸다. 어이가 없기는 분신들도 마찬가지. 잠깐, 그럼 원래 있던 본점은 어쨌고요?

본점은 애석하게도 장사도 안 돼서 접어야 했다는 도영 씨의 말. 그리고는 정리하던 중에 애지중지하던 커피머신을 부숴 먹어서 집에서 펑펑 울었단다. 이럴 때는 꼭 나랑 다를 바 없다니까. 아무튼 간에, 카페를 다시 열고 싶다고요? 그러자 도영 씨는 강하게 긍정.

그리고는 이나리와 같이 번역 작업에 썼던 공책을 주워다, 뭔가를 대문짝 만하게 써내려 간다. 그리고 보여준 글씨는 테이블보에도 쓰여 있던 'Teritorio de Leontodo'. 한 번 읽어보라신다. 그러니까 테리토리오 드….

"테리토리오 데 레온토도!"

전에도 말했지만, 에스페란토로 '민들레 영토'라는 뜻이다. 그 말인 즉슨, 민들레 홀씨 되어 날아가듯 왔으니 이 왕국에 정착하겠다는 뜻이다. 도영 씨가 개인적으로 민들레를 좋아한다고도 했으니, 민들레는 도영 씨의 상징이자 가게의 상징이 될 듯 하다. 도영 씨가 휴대폰을 통해 보여준 세계도 있었으니, 나는 더욱 믿음에 차기 시작했다. 다들 박수를 치는 와중에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아빠다.

"미사키. 아빠 퇴근할 건데, 안 가?"

아 맞다. 가야죠. 이윽고 도영 씨 더러 내일 보자 시는 우리 아빠. 그렇게 도영 씨와의 짧은 만남은 거기서 끝이 났다. 어차피 다시 만날 게 뻔하긴 하지만.

집에 돌아와 보니, 맙소사. 집안이 말도 아니다. 돌덩이가 하도 늘어나서 이젠 열 두 덩이가 놓여 있다. 보나마나 카나데 언니가 한 거다. 하는 수 없이 유니코와 라이오가 하나 씩 들고, 나머지는 2인 1조로 하나씩 돌덩이를 옮겼다. 집 앞에 놓인 돌덩이가 산을 이룬다. 주변의 감시 카메라도 고개를 돌릴 정도면, 정말 답이 안 보이는 듯 싶다.

식탁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8명의 미사키 플러스 부모님 정도만이 식사를 하고 있다. 나머지는 직접 밥을 갖다 줘야만 먹는 시늉을 한다. 이런 비일상 같은 일상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정말로 도영 씨가 구세주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는 나를 문득 쳐다보시는 듯한 우리 아빠.

도영 씨라면 분명 될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신다. 아빠 말씀이 정말이었으면 좋겠어. 다시 그 때의 화목한 가정으로 돌아가고 싶고, 분신들이 다시 부활동에서 뛰노는 모습도 보고 싶어. 하루카하고도 다시 투닥댔으면 좋겠어.

※ 'Teritorio de Leontodo'는 에스페란토로 '민들레 영토'를 의미합니다.
※ 이 소설은 '성 아랫마을의 단델리온' 팬 픽션으로, 매주 토요일에 2파트 씩 연재됩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결코 '환경'이나 '유전자' 따위가 아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존재의 연속성'이다.